공연, 연주 감상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사라지게 하는 피아니스트, 그리고 그 반대의 피아니스트

raker 2023. 4. 15. 12:31

2009/03/16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피아노 공연 실황을 DVD로 감상했습니다.

리스트의 연습곡이었는데 곡을 쳐나갈 때마다 진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땀도 엄청나게 흘립니다. 곡 하나를 마치면 수건으로 한 번씩 닦아주어야 할 정도지요. 연주하는 동안에도 호흡이 가빠지면 코 끝에 매달린 땀방울이 분무되기도 합니다.
특히나 어려운 부분에 도달하게 되면 얼굴이 점점 시들어가듯이 기력이 빠지는 데 이 부분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스타워즈 3에서 팰퍼틴 의장이 마스터 윈두와 겨루기를 하면서 시들시들 거의 죽어가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이 장면 외에 딱히 그 상황을 적합하게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곡 하나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진을 빼는 모습을 피아니스트 지망생이 보게 된다면 아마도 무서워서라도 포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베레조프스키의 무시무시한 테크닉도 피아니스트 지망생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런 모습을 관객들이 봐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곡과 곡 사이마다 박수를 쳐주네요.
이 공연물을 보고 있노라면 곡 하나하나가 연습곡이라고 하기보다는 연주용 곡인 것처럼 들리게 해 줍니다.
연주가 끝나고 나면 비 맞은 듯이 옷이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네요. 
나중에 부가영상을 보니 연주하다가 피아노줄을 끊어먹었네요. 본편에서는 피아노 줄을 끊어먹은 그 부분은 편집되어서 스페셜 피쳐로 옮겨 실렸습니다.

잠시 피아노 줄 갈고 조율하는 등 시간상 공백이 있어서 집중력이 저하될 법도 한데 편집된 공연물을 보다 보면 그런 굴곡이 없이 계속해서 일관되게 최상의 컨디션에서 무대를 장악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레조프스키의 정신력도 비범한 것 같고 피아노 줄을 끊어먹기도 여러 번 해 먹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 베레조프스키의 연주 스타일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의 피아니스트라면 Valentina Lisitsa가 있겠습니다.
이 여류 피아니스트는 어마어마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데도 너무나 쉽게 피아노를 가지고 놀듯이 쳐내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아무나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리고 호로비츠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손만 쓱 키보드 위에 갖다 대기만 하면 소리가 나는 것 같고 피아노 칠 때의 표정도 꼭 피아노를 가지고 놀듯이 해서 사람을 방심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