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는 성경에 바탕을 두었는데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닙니다.
대본이 약간 더 다듬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만약 연출이나 무대미술마저 부산스러웠다면 정신없어져서 중국 스러워졌을 것 같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았어도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운 분위기가 난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2022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은 연출에서 오버스러움을 최대한 많이 거둬냈고 무대 미술도 최대한 간결하게 처리해서... 그나마 곡에 집중하도록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메조소프라노는 오페라에서 남자를 파멸시키는 툴로 사용되곤 하는데요.
성경 속 영웅 삼손 역시 델릴라를 만나게 되면서 여자의 강력한 무기인 설득과 압박의 콤비네이션 어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탈탈 털려버리게 됩니다.
오페라에서 영웅을 거꾸러트리는 것은 가장 강한 자의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자의 종횡무진한 대화 스킬을 통해서더군요.
바그너 악극 발퀴레에서 보탄의 부인이자 결혼의 여신인 프리케는 부인을 빼앗긴 훈딩으로부터 기도를 듣고 보탄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프리케는 신들의 우두머리인 보탄을 대상으로 자신이 결혼의 여신으로서 신성한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탄이 계획한 자유의지를 가진 지그문트가 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하도록 보탄에게 끈질기게 설득합니다. 보탄은 어쩔 수 없이 꿍꿍이를 펴던 것을 전면철회하게 됩니다... (보탄의 계획 번복으로 인해 또 다른 인물이 불행을 짊어지게 되고 다음대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델릴라도 자신을 몰래 찾아온 삼손을 붙들고는 자신이 불행하다 사랑이 식은 거냐 등등의 무한 반복으로 끈질기게 들볶아서 삼손의 영업 비밀을 취득하게 됩니다.
끈질김에 있어서 프리케와 델릴라는 막상막하를 다룰 정도.
그리고 영업 비밀을 실토한 삼손은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현대적인 해석으로는 델릴라가 삼손을 너무나 사랑하고 삼손 역시 개인 레이어에서는 델릴라에게 완전하게 매혹되었는데, 사회인으로서의 삼손은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에 바쁘기도 하고, 주변에서 대놓고 델릴라와의 만남을 만류하여... 결과적으로는 델릴라를 등한시하게 되면서... 실연의 상처를 가지게 된 델릴라는 삼손에게 복수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편 다곤의 대사제는 자신의 숙적 삼손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델릴라인 것을 감지하여 그녀에게 접근하여 은밀한 제안을 하고, 결국 델릴라와 협력으로 난적 삼손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불쌍한 삼손... 그러나 삼손 역 백석종의 톤과 그가 부른 노래는 너무나 감미롭군요. 백석종의 다음 오페라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몹시 기대됩니다.
엘리나 가랑차의 노래 역시 너무나 뛰어납니다.
201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출연한 엘리나 가랑차가 악녀 카르멘을 너무나 멋지게 잘 표현해 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컨디션이었을 때 삼손과 델릴라도 공연할 수 있었다면 인류에게 대단한 자산을 남겼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뛰어난 메조소프라노를 보는 것은 쉽지 않아서요.
그러나 오페라 가수에게 주어진 전성기는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22년 엘리나 가랑차는 몸이 순발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악역을 제대로 하려면 몸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배역을 표현하는 데 큰 재산일 것 같은데... 엘리나 가랑차는 오페라 가수로서 큰 장점이고 비범함을 증명해 주었던 도구 중 하나를 잃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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