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연주 감상

마르타 아르헤리치 연주회[2008]에 다녀왔습니다

raker 2023. 4. 14. 13:22

2008/05/08
정명훈이 서울시립교항악단을 지휘했고요 곡명은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습니다.
저는 1층 앞에서 6번째 줄에서 들었습니다. 더블베이스 쪽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손은 볼 수 없었고 얼굴만 보이는 자리였어요.

아르헤리치는 연세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아노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실내악 활동을 하고 음악제 감독을 하고 후학을 지원하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어서 무리하지 않은 강도로 연습했을 줄 알았는데 연주 수준을 보면 연습의 강도를 상당히 높여서 꾸준히 연마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아르헤리치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지지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분인데 이 분의 연주를 들어보니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어째서 대형 연주장에 적합한지를 증명하고 남을 정도로 놀라운 색채를 들려줬습니다.
아르헤리치의 소리는 빠르고 깨끗하고 직접적(straightforward)입니다. 잡소리가 뒤섞이지 않습니다.
애매하지 않고 직접적인 소리를 내줬던 다른 연주가들로는 우선 몽세라 카바예(성악)나 발레리 소콜로프(바이얼리니스트)가 생각나는군요.
이렇게 표현하면 혹시 아르헤리치의 소리가 가녀리다거나 날카로운 소리로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닙니다.
선명한 음색을 가졌지만 그 기저에는 피아노의 몸통 울림이 밑바탕 되어있는 소리예요.
그리고 힘이 없어서 그렇게 들린 것도 확실히 아닙니다. 아르헤리치는 남성 못지않은 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이 구경 가신 분은 역도선수 같다고 하실 정도예요. 1994년 내한공연에서는 강한 타건으로 피아노줄을 끊어먹기도 했었습니다.

아르헤리치의 피아노 소리는 대형 연주장에 아주 적당한 소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들어본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노 소리들은 소리가 감겨들기라도 한 듯 몽실거리게 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1층 뒷줄에서 들어서 그런 걸 지도 모르니 그 점은 감안해서 이해하시면 될 것 같네요) 같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인데 소리는 그처럼 다르게 표현이 되는군요.
여기서 잠깐 샛길로 빠져나가 보겠습니다. 악기의 작동 원리상 하프시코드는 건반 하나에서 셈여림의 차이밖에 낼 수 없지만 피아노는 건반 하나에서도 연주자의 하드웨어(근골격)나 주법에 의해서 무한한 소리의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를 때 뼈와 살이 부딪치는 속도의 차이라던지 손가락 쿠션의 정도 그리고 강도의 타이밍 차이에 의해서 소리가 달라지는 거겠지요. 거기에다가 페달까지 가세하면 조합은 무한대가 됩니다.
여기서 한번 더 딴 길로 빠져보자면 디지털 오디오 신호를 수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ON OFF를 하프시코드처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는 디지털 신호는 ON OFF라 하더라도 피아노처럼 다양한 변수라고 해야 하나 다채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전기로 ON OFF를 만들어내게 하는 방형파는 전기의 상태, 오실레이터의 진동, 회로나 소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전기적인 공진 등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게 되니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르헤리치의 특별함을 만끽하게 해 줬던 것은 앙코르 곡으로 연주했던 스카를라티, 쇼팽, 슈만의 곡이었습니다. 스카를라티의 곡은 피아노에서 이렇게 색채를 낼 수 있다는 걸 듣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어떤 분은 공연실황 DVD에서 스카를라티의 곡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고 하시던데 그걸 실연으로 들을 수 있게 될 줄 몰랐다며 행복해하셨다는군요.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독주곡에서 좀 더 엄청난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음이 피어나고 사그라지는 데 그것이 우격다짐이 있다거나 덜컹거림이 없게 자연스러운 궤적을 이루게 하는 게 놀랍습니다. 마치 수백 개의 공을 튀겨서 저글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공이 떨어질 때는 가차 없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튀기고 올라가는 동안에 공의 속도나 궤적이 불안정하거나 끊기지 않고 스무스하고 최고점에 가까이 가면 속도가 저절로 감속해서 손에 스르륵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그리고 박자 안에서 각각의 음표들은 제각기의 생명과 주기를 가지고 마이크로 코스모스로 존재합니다. 큰 틀에서 전체적인 빠르기와 프레이즈는 음악적으로 흐르면서도 각 음에 해당하는 것은 템포와 주기를 약간씩 느리게도 또 빠르게도 해서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처럼 우주에 흐르는 운동의 에너지가 느껴지게 합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나 타이어 광고에서 휠이 스르륵 돌다가 어떤 때부터는 역방향으로 도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게 있는데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피아노 독주에서도 그런 느낌과 유사하게 느껴지는 마술 같은 운동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분의 독주회가 있으면 꼭 다시 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분 독주회는 1985년 이후로 10년간 안 하셨고요 1995년에 일본에서 한번 했었다고 하고 1997년에 미국에서 독주회 할 때는 유럽에서 이분 독주회를 보러 미국으로 오기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청중에는 폴리니 같은 당대의 슈퍼 스타 피아니스트도 있었다고 하네요.
아르헤리치는 여러 면에서 호로비츠를 연상시키게 합니다.

이 공연은 정말 평생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