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연주 감상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톤 (음색)

raker 2023. 4. 14. 13:09

2007/09/24

파바로티가 대단한 성악가였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파바로티의 음색을 놓고는 얘깃거리가 될만한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의 톤은 파워가 있으면서도 대단히 정밀하고 얇으며 직선적이고 화려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독창자로 나설 때는 청중을 쉽게 들뜨게 만들고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게 합니다.
보신 분은 공감하시겠지만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들고 (Nessun Dorma)'만큼 공연에서 곡 하나만으로도 청중을 완전히 가열시키고 그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성악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프라노와 같이하는 이중창에서도 독창에서만큼 그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중창에서 파바로티의 독특한 음색에 멋들어지게 맞춰지는 소프라노의 톤을 생각해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서로 비슷하게 소리가 나니까 시끄러워질 수 있을 때가 많은 것 같고요. 잘 맞아떨어지는 조합이 줄어듭니다.
기껏해야 라보엠 처럼 여자주인공이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이고 수동적인 역할을 가지고 소프라노의 톤도 그런 수용적인 스타일일 때만 좋은 것 같습니다. 미렐라 프레니와 함께했던 라보엠이 잘 어울렸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바로티의 톤이 아닌 대부분의 테너가 가진 톤은 소프라노와의 이중창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비야존이나 도밍고 같은 테너는 뜨겁고 두터운 남성의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예리하고 섬세하고 화려한 소프라노의 음색과 잘 어울려서 서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런 음색의 조합이라면 대부분의 오페라 배역에 출연이 가능해집니다. 도밍고가 150여 배역을 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오페라에서 음색상의 배치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파바로티가 오페라 레파토리를 많이 가지지 못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은 이런 음색상의 요소를 고려하지 못한 것 같고요, 그중에 제일 고려할 값어치가 없지만 유명해진 이유로 그가 악보를 읽지 못해서라는 주장도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파바로티 본인은 더 많은 오페라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문제는 그런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다르게 그의 소리가 꼭 맞아떨어지는 곡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파바로티의 독특한 음색을 고려해 보면 소프라노와의 이중창보다는 좀 특이하게도 테너들과의 이중창이나 삼중창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1990년도 로마 월드컵을 기념한 'The Three Tenors"공연이 바로 그런 예가 되겠습니다. 저는 파바로티가 있었기 때문에 스리 테너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파바로티가 빠지고 다른 테너가 참여했다면 음색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서 수평적으로는 스케일이 크겠지만 뭔가 하나의 패키지로 수렴할 수 있는 완결성이 부족했을 거라고 봅니다.

이제 파바로티가 별세했기에 스리 테너 공연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겠는데요. 그 이유는 파바로티만한 테너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음색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셔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런 점에서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념한 발트뷔네 콘서트에서 도밍고, 비야존 그리고 네트렙코(소프라노) 삼총사 조합이 포스트 파바로티 시대에서 기용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파바로티가 원래부터 그렇게 특이한 음색을 가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좀 더 두께를 가지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그런 소리를 하게 되면 다른 단점 부분을 노출시키게 된다고 하네요. 아마도 자신의 단점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가 낼 수 있는 소리 중에서 선택적으로 현재의 소리를 내도록 한 것 같고요. 그런 결정으로 인해 스리테너 콘서트라는 전무후무한 이벤트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파바로티는 그의 선택에 의해서 오페라 레파토리를 많이 가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그 대신 부족한 부분은 크로스오버를 꾸준히 시도하면서 다른 방면에서 그의 재능을 더 발휘하려고 노력해 온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그의 업적과 노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오디오 평가 청취를 하는 제 입장에서 봤을 때 그의 소리는 워낙 독특해서 남성 성악가의 목소리에서 레퍼런스 소리로 채택하지는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