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플레이어 외

보우 테크놀로지 ZZ-8 CD플레이어 (리뷰대여)

raker 2023. 5. 29. 08:01

2007/05/02

보우 테크놀로지는 1996년에 처음 내놓은 ZZ-1 인티그레이티드 앰프와 ZZ-8 일체형 CD플레이어를 통해서 전 세계 오디오커뮤니티에 퍼져있는 상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오디오 성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번잡해지고 덩치가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디지털 오디오 재생기기의 경우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디지털 기술을 구사한 제품을 놓고 업체와 잡지에서 법석을 떠는 것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여서 부지불식간에 디지털 부문에서의 기술 격차가 제품의 오디오 재생능력에 대단한 격차와 차별성을 주는 것으로 믿게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보우 테크놀로지 ZZ-8는 범용 디지털부품을 이용한 간결한 일체형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최정상급 디지털 제품군에 낄 자격이 있는 수준의 훌륭한 소리를 내줬다.

사람들은 평범해 보이는 조건으로 어떻게 그런 수준의 소리를 내줄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그 비결은 부품 개수를 적게 사용하되 그 대신 제대로 선정하는 것이란다. 부품을 선정할 때는 부품 단독이 지닌 고유성능만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회로상에서 다른 부품과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부품을 하나씩 바꿔가면서 청취해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결을 알고 난 후에 사람들은 특별한 디지털 기술을 가지지 않고서도 귀로 들어가면서 튜닝한 것만으로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국내에는 ZZ-8 1세대 모델이 수입되었으나 그 후 수입원이 변경되면서 ZZ-8의 공급이 중단되었다. 이제 다시 국내 수입원이 변경되면서 ZZ-8의 수입을 재개한다고 한다. 이번 리뷰에서 다루게 될 제품은 내부가 완전히 교체된 ZZ-8 3세대에 해당하는 제품이다. 필자에게 전달된 제품은 검은색 마감의 제품이지만 수입원에 문의해 보니 한국 내에 보급시킬 제품의 마감은 누드 알루미늄이 될 거라고 한다.


우선 3세대 제품의 바뀐 부분에 대해서 소개한다. CD 메커니즘은 CDM Pro 12에서 Pro 2M으로 변경했다. 지터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CD 메커니즘과 DAC 보드 사이의 신호전송에서 I2S전송을 채택했고 DAC보드에는 고정밀 클럭을 장착했다. DAC보드에서 생성한 고정밀 마스터클럭에 동조하게끔 CD 메커니즘을 개조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DAC보드에는 버브라운 CPM1704 DAC칩을 사용했다. 1세대 제품에는 디지털 출력이 RCA와 BNC가 있었는데 이제는 둘 다 RCA다 되었다. 스태빌라이저의 모양이 달라졌다. 언뜻 보면 메르세데스 벤츠의 로고처럼 생겼다. 1세대 제품에 있던 스태빌라이저는 안쪽에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해서 내구성이 약했는데 3세대 제품에서는 전체를 금속으로 만들었다.

일반적인 동작과 관련된 소개를 덧붙인다. 제품 상판에는 여섯 개의 토글스위치가 달려있다. 이 금빛 스위치는 손을 떼면 다시 원위치로 복원되는 타입이다.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쪽으로든 움직일 수 있으므로 편의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 어두운 아크릴에는 빨간색 LED를 통해서 재생하는 트랙과 경과시간이 표시되도록 되어 있다. 리모컨을 통해서 LED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다.

청취에 사용한 제품에는 dCS P8i SACD플레이어, 소니 SCD XA-9000ES SACD플레이어, 크렐 FPB300 파워 앰프, JVC AX-V8000 AV리시버, 아캄 델타 290 인티앰프, 레벨 퍼포머 M-20 스피커와 에포스 M12스피커들이 있고 실텍 MXT 뉴욕 스피커 케이블과 디스커버리 에센스 밸런스드 인터커넥트 그리고 몬스터 스튜디오 프로 1000을 비롯한 여러 케이블을 사용했다.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독주곡(데카 475 6198)을 틀어보면 전 대역에 걸쳐 고른 모습을 보여준다. 인위적으로 특정 대역을 강조하거나 광채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정직함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일흔을 바라보는 거장이 풀어내는 숙성할 대로 숙성한 표현이 오디오 제품의 인위적인 조작으로 인해 변조되었다면 연주의 품격이 이만저만 손상되는 것이 아니었을 텐데, ZZ-8을 통해서는 소리의 품격이 잘 유지되고 있다. 톱 로딩 방식의 강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견실한 바디는 음악 재생에 올바른 무게를 갖게 해 주어 아쉬케나지의 연주가 믿음직하고 당당하고 늠름하게 들리게 한다.


게르기에프가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필립스 468 035-2)에서는 키로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지휘자에게 주술이 걸린 듯이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끈끈하고 흐물흐물 거리는 듯이 흐드러지다가 순식간에 갑자기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묘한 타이밍의 신축에 여러 번 노출되다 보면 어느덧 청취자가 시공간의 신축을 통과해서 어느덧 연대 미상의 원시세계로 이끌려 온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들려오는 오케스트라의 포효는 주술로 창조된 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의 원천을 보기라도 한 냥 소스라치게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소스 기기에 따라서도 청취자가 주술에 빠지는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제대로 깊숙하게 주술에 빠질 수 있게 해주는 소스 기기는 몇 되지 않는다. ZZ-8은 밑바닥까지 갈 수 있을 만큼 깊숙이 주술에 빠질 수 있게 해 준다. 그 정도로 음악적인 다이내믹을 재생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저역의 에너지와 제어능력과 해상력이 출중하다. 그것은 아마도 CD 메커니즘의 오리지널 케이스를 떼어내고 금속 블록에 곧장 고정한 효과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성이 너무 지나쳐서 음악을 손상한다거나 어쿠스틱 악기의 소리를 추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미래가 촉망되는 여류 바이얼리니스트 율리아 피셔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녹음(펜타톤 PTC 5186 064)에서는 스테이지가 넓게 느껴지고 공간감이 좋았다. 악기의 음색도 괜찮다. 필자가 사용하는 디지털 오디오 재생기에서는 여성이 연주한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그에 비하면 ZZ-8을 통해서는 남성다운 면이 강조되었다는 인상을 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나쳐서 신나고 활기 넘치고 즐거워하고 연주자가 스스로 음악을 통해서 재미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훼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현악기를 듣다 보니 섬세한 표현을 특별히 제약하는 제한사항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범용부품으로 내줄 수 있는 해상력의 제약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런 조심스러운 의심은 루터의 레퀴엠 음반 (레퍼런스 리코딩 RR-57CD)에서 무한하게 퍼져나갈 것 같은 공간감이 나와주지 않는 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시각을 돌려 다른 음악 장르에서는 금관악기의 팽만한 볼륨을 제대로 표현하고 리듬감이 좋고 힘이 있고 해서 찾으려 하고 작정하면 다른 제품보다 훌륭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이 제품은 쓰면 쓸수록 탐이 나는 제품이다. 소리도 좋을 뿐만 아니라 만듦새와 마감은 최고의 수준이다. 손에 닿는 촉감과 조작감도 훌륭하다.
전체적으로는 좀스런 부분이 없고 당당해서 원래부터 잘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경험하면 할수록 건실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없이 척척 해내서 샘도 나고 탐도 나는 그런 사람과 비슷하다. 피곤한 소리라거나 억지를 부리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외관은 LP시대에 대한 오마쥬가 깃들어 있어서 변함없이 멋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회사는 어떤 것이 음악적인 쾌감을 가져오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발전한 디지털 제품의 수준에 경쟁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일 년 여의 시간을 투입했고 이번에도 제대로 음악을 풀어낼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적합한 컴포넌트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마술과 흥분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멋지고 흥분되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오디오 애호가에 의해서 설립된 회사가 아직도 변함없이 오디오 애호가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즐거운 일이다.


리뷰를 마치고 제품을 포장해서 떠나보낼 때 아쉬움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짝사랑을 할 것 같다. 이런 기분은 BAT VK-D5SE CD플레이어 이후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지금도 ZZ-8을 연결해서 들었던 아라우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에서 맛봤던 피아노의 질감이 삼삼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