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연주 감상

로얄 오페라 하우스 바그너 발퀴레 2018

raker 2023. 4. 25. 19:06

2020/03/21
1막이 오르면 전주곡에서 지그문트가 숲을 헤치고 역경을 겪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덕션에서는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지글린데가 훈딩의 집에서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지그문트역의 Stuart Skelton의 소리가 좋습니다. 훈딩역의 Ain Anger의 소리나 연기도 좋습니다. 지글린데 역을 맡은 Emily Magee 역시 연출 의도에 맞게 연기를 충실하게 따라와 줍니다. 

이 프로덕션에서는 보탄이 지그문트에 거는 기대나 의도대로 되지 않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1막에서는 지글린데의 억눌림이 폭발하며 드라마 전개를 이끄는 강력한 촉매 역할을 합니다.
지그문트도 이 강렬한 흐름에 휩싸여서 결과를 알 수 없는 길에 동참하게 됩니다.
(지그문트가 고난을 겪게 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보탄은 생각해 둔 것이 있어 만만합니다)

그런데 2막에서 보탄의 아내 프리카가 보탄을 애원하고 집요하게 설득합니다.
결국 보탄의 의도는 망가지게 되고 상심하게 됩니다. 

게다가 3막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하던 브륀힐데가 보탄의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보탄의 의도는 이미 망가진 데다가 아끼는 딸마저...
보탄은 분노를 조절할 수 없게 됩니다.

발퀴레는 등장하는 배역은 많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어느 프로덕션의 발퀴레를 보건 간에 남편은 아내의 파워를 당할 수는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서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영혼이 탈탈 털리는 프리카는 2010년 스칼라 프로덕션에 출연한 에카테리나 구바노바 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2018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에서는 비즈니스로 함께 사는 사이가 아니라 사랑해서 함께 사는 사이로 설정이 되어 있고 (프리카는 자식을 가지지 못해서 보탄이 난봉꾼 짓거리를 하고 다니더라도 참아주는 설정입니다...) 프리카 역할을 맡은 Sarah Connolly는 어르고 낙담하고 집요하게 설득해서 보탄의 마음을 돌려놓습니다.
보탄이 프리카를 얻기 위해서 눈을 희생했던 것을 감안해 보면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의 설정과 연기가 훨씬 더 흡인력이 있게 연출이 된 것 같습니다. 보탄 역할을 맡은 John Lundgren의 연기도 대단히 흡인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덕션을 보면 볼수록 지그문트가 더 불쌍해집니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기보다는 선택당해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린 아이콘이 되어 버리게 되니까요.
(아버지 영향으로 무리에 섞여있지 못하고 떠돌게 되고, 그렇게 자라 생각이 남다른 지그문트는 길에서 처음 보는 여자를 돕다가 살생도 하고 간신히 자신의 몸만 피하면서 죽을 지경에서 간신히 벗어났는데, 죽다 살아난 바로 그날 처음 보는 지글린데에 얽혀 또 한 번 큰 사고를 치게 됩니다. 이번에는 인간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뿐만 아니라 신까지도 가세하면서 죽을 지경을 맞게 되는 신세가 되어버리네요)

이 프로덕션에서 브륀힐데와 지그문트의 장면은 강렬하지는 않았습니다. Nina Stemme의 낮은음이 매력적이었습니다만 배역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글린데가 다시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된 장면은 강렬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보탄과 브륀힐데의 장면은 감정선이 좋고 흡인력이 있어 지겹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세트 디자인과 무대 연출도 적절해 보였습니다. 

엄청 잘 만든 프로덕션이라고 느끼면서도... 브륀힐데의 목소리가 좀 더 젊게 들렸다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 다른 발퀴레를 찾아보고 싶어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