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걸작 《란(乱, 1985)》을 최근 4K UHD 화질로 다시 감상했습니다.
감상평을 제미나이, 퍼플렉시티를 이용해서 다듬었습니다.
오래전 기억 속 저 편에 남아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걸작 《란(乱, 1985)》을 최근 4K UHD 화질로 다시 감상했습니다.
워낙 오래된 연식의 필름 영화라 화면 상태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재생 버튼을 누르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복원은 프랑스의 Éclair(에클레르) 연구소에서 StudioCanal과 Kadokawa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고, 오리지널 카메라 네거티브를 기반으로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미지별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컬러 그레이딩은 구로사와의 촬영감독 중 한 명인 우에다 쇼지의 승인을 받았으며, HDR10과 Dolby Vision을 모두 지원하는 HDR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필름의 긁힘이나 잡티가 말끔히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와다 에미의 강렬한 원색 갑옷과 깃발, 불타오르는 성의 비주얼은 HDR 기술을 만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습니다. 필름 복원의 훌륭한 모범 답안을 본 듯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공룡'의 집착
화면을 채우는 압도적인 스케일—실제 크기의 초대형 성 세트, 들판을 메운 약 1,400 명의 엑스트라와 200여 마리의 진짜 말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스쳤습니다.
"1980년대라는 시대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도대체 왜 이토록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이런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까?"
사실 1970~80년대의 영화 산업은 이미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TV의 보급으로 영화 관객이 줄어들었고, 제작사들은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규모 예산의 효율적인 스튜디오 영화를 선호했습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타협 없는 완벽주의와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고집했던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 영화계에서 "시대에 뒤처진 돈 많이 쓰는 공룡" 취급을 받았습니다. 투자자들에게 외면당한 그는 고국에서 입지를 잃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할 만큼 깊은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해외 거장들이 안겨준 마지막 기회
하지만 그를 구원한 것은 해외였습니다. 구로사와를 '영화적 우상'으로 섬기던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미국 감독들이 꾸준히 지원했고, 결국 프랑스의 명제작자이자 《7 인의 사무라이》유럽 배급을 맡았던 세르주 질베르망의 대규모 투자를 끌어내면서 마침내 그의 숙원작이었던 《란》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란》의 제작비는 1100~1200만 달러로 당시 일본 영화 사상 최고 예산이었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 속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답의 힌트는 영화 그 자체에 담겨 있었습니다.
《란》: 구시대의 마지막 진혼곡
영화 《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센고쿠 시대 일본으로 각색한 작품이며, 주로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영화《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완전하게 변하는 시점을 그려내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877년 일본에서 일어난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의 비장한 그림자가 겹쳐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구로사와 감독의 의도라기보다 관객들이 읽어낼 수 있는 해석의 하나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기술과 시스템 앞의 무력함: 영화 속 클라이맥스에서 히데토라 가문의 장수들과 기병들은 밀집 대형을 갖춘 적들의 조총 세례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는 칼과 화승총을 들고 명예를 다투던 사무라이들이, 근대식 기관총과 평민 징병제로 무장한 신정부군 앞에서 무참히 궤멸당했던 세이난 전쟁의 역사적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합니다.
- 거장의 자기고백 (히데토라 = 사이고 다카모리 = 구로사와): 한때 시대를 호령했으나 자신이 만든 세계의 파멸을 목도하고 광인이 되어 방황하는 주군 '히데토라'. 영화 속 히데토라는 자신만의 관념에 빠져 주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반면, 주변 인물들은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대비를 보입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영웅이었으나 근대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사무라이의 종말을 안고 사지로 걸어 들어간 '사이고 다카모리'와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현대적 스튜디오 시스템과 효율성에 밀려나면서도 자신의 아날로그 예술관을 끝까지 고집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자기 자신의 고독한 투영이기도 합니다.
허무(虛無)의 미학으로 완성된 거장의 유언
세이난 전쟁을 끝으로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라는 계급은 영원히 소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로사와 아키라가 《란》에서 보여준 "진짜 성을 짓고 불태우며 약 1,400 명을 들판에 풀어놓는 아날로그 에픽 연출" 역시 이 영화를 끝으로 영화사에서 사실상 종언을 고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벼랑 끝에 홀로 남겨진 눈먼 소년이 부처(아미타불)가 그려진 족자를 떨어뜨리는 장면은 어떠한 구원도 없는 참혹한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 시대의 화려했던 유산이 완전히 끝났음을 고하는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진혼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4K UHD라는 최신 기술의 렌즈를 통해 다시 만난 《란》. 그것은 단순한 스펙터클 시대극이 아니라, 시대에 타협하지 않았던 한 비타협적 거장이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바친 가장 비장하고 화려한 자기고백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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