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사보 1995년 9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작가 최인호 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대하소설 잃어버린 왕국 내용을 축약했습니다.
(사용 음악: 브람스 교향곡 1번)
망명왕국 新百濟: 일본
소란스러운 영화 예고편이 끝나고 스크린이 잠시 어두워진다. 영화 제목이 비춰지고 아직 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차고 축축한 밤이슬과 함께 땀에 흠뻑 젖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다. 제작자와 출연진의 자막이 화면 한구석에서 부지런히 보였다가 사라지는 동안 카메라는 마을 군데군데 방화로 무너져 버린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역겨운 송장 타는 냄새를 잡고 있다. 화면이 다시 어두워지며 내레이터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한다.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에워싸인 백제의 수도의 사비성 문을 자진하여 연 것은 의자왕의 아들 융왕자였다. 의자왕을 비롯한 1만 3천 여 명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백제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복신(福信) 대장군은 저항군을 조직하여 3년간 나당 연합군에 대항했으며 일본에서 활동 중인 의자왕의 아들 풍(風) 왕자를 모셔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한다. 의자왕의 친동생이기도 한 일본 천황 제명여제(齊明女帝)는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고 형제국인 백제를 도우러 풍 왕자에게 5만의 병력을 주어 백제부흥전쟁에 참전하게 한다. 그러나 왜군은 백강 어귀에서 네 번의 전투에서 모두 참패하여 철수하게 된다. 왜군이 철수하면서 백제의 난민들도 데리고 갔다. 이 영화는 바로 우리의 시각과 역사책에서 증발해 버린 그 배에 탔던 사람들과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1악장 (出百濟, 663년 9월 1일)
팀파니의 장중한 연타로 화면이 다시 밝아온다. 팀파니의 그르렁대는 울림이 계속 이어지면서 백제난민의 무리가 왜선을 향하는 절박한 모습은 현악기의 피치카토로 묘사되고 있다. 얕은 언덕 아래로 닻을 올리려고 하는 왜국의 선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해진 이들 무리의 모습은 첼로의 크레셴도로 그려내고 있다.
단 이틀간에 걸친 전투로 천 여 척의 군선에서 4백 척을 잃고 풍 왕자마저 행방불명이 되어 백제부흥전쟁은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나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전쟁. 당(唐)의 해군선단을 지휘한 것은 바로 풍 왕자의 형인 융왕자였으니...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나민들이 몰려들어와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이번이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리라. 팀파니의 트레몰로와 불협화음으로 왜군의 험악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으며 클라리넷의 흐느낌은 절박한 난민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다. 무장, 백제의 귀족, 역사가, 문필가, 관료, 의사, 건축기사 등의 사람들이 겨우 자리를 얻어 배에 올라갈 수 있었다. 플루트에 이은 현악 총주(總奏)로 선택받은 사람들의 안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도 잠시뿐. 그날 저녁부터 격한 풍랑을 맞이하게 된 배들은 나뭇잎처럼 속절없이 위아래로 내던져질 뿐이었다.
금관악기의 쩌렁쩌렁한 포효에 이은 현악기의 하강과 상승화음, 악센트를 주며 일었다 당기며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몰아대고 있다. 끊어질 듯 매달려 있는 돛대처럼 배에 몸을 실은 수많은 생명들도 실낱같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합장하며 불경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왜 그리도 크게 들리는가. 둔탁한 요동. "끼끼긱!" 자지러지는 나무의 파열음. 소용돌이치는 물굽이와 천둥소리를 묘사한 듯한 호른의 스포르짠도는 지루하게 번갈아 들려온다.
마침내 바다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이 탈진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듯 바다가 순해지며 새벽이 가까워진 듯 수평선 위로 구름들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2악장 (백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663년 9월 27일 왜국의 주꾸시국에 도착한 난민들은 백제와 선상에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것보다 더한 허탈감에 빠진다. 무력감과 그들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정을 현악기의 하강화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 앞에 중대형(中大兄)이라는 이름의 태자가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파병을 진두 지휘하던 제명여제는 대선단의 출정 전에 이미 타계했으나 그는 백제를 회복하려던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기 전까지는 상복을 벗지 않고 즉위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음성은 하이 톤으로 낭랑하게 연주되는 클라리넷으로 묘사되며, 그의 말에 감격한 백제 난민의 모습들이 정말 아름다운 현악기의 상승화음으로 소리 맞춰 대답하듯 들린다.
클라리넷이 다시 아름다운 여운을 내며 낮은 톤으로 이야기한다. 나당 연합군이 왜국까지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하기 위해 대마도와 규슈(九州) 지방에 백제식 산성을 쌓아 싸울 수 있는 천연의 요새를 만들 것이라고. 백제난민은 기뻐한다. 술렁이는 듯 현악기와 틀루트가 대응을 한다. 그리고 클라리넷의 음성은 다시 수십여 명의 백제난민을 요직에 기용하여 요새화계획을 단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플루트가 리드하며 현악기를 이끈다. 현악기가 피치카토를 퉁기면서 나직하고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신념 있는 소리를 내어 답한다. 놀라운 기술과 무서운 집념과 쉬지 않고 일하는 부지런한 백제인의 천성으로 그의 뜻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백제인들은 그의 말을 기억하며 고향으로 갈 날을 생각하며 쓰라린 패배와 치욕과 슬픔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언젠가는 저 바다를 건너 다시 고향으로 돌라갈 수 있겠지...
그들이 이런 꿈을 꾸는 동안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독주와 어울린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들은 이역 타국 땅에서 맞는 첫날밤 꿈속에서 평화스러웠던 고향에서 잃어버린 가족들과 정다운 재회를 하고 있었다.
3악장 (新百濟, 日本의 탄생)
저음 현의 피치카토가 계속되면서 그 위로 클라리넷의 선율이 크레셴도로 커져 간다. 더 높은 음의 플루트와 피콜로가 대답하듯이 흥겨운 리듬을 담아낸다.
백제 유민들은 언젠가는 저 바다를 건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칼과 창을 들고 병술을 익히고 있었으며 부지런히 산성을 그곳에 쌓아왔다. 화면이 성벽을 쌓는 그들의 모습을 담는 동안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리듬과 끈끈한 현악기의 대응으로 분위기를 맞춰주고 있다.
내륙지방을 향해 차례차례 성을 쌓아가 제1의 방어기지를 대마도의 근전성으로 삼았으며, 제2의 방어기지를 오늘날 후쿠오카의 수성(水城)과 대야성(大野城)으로 삼았고 최후의 방어진지를 내륙지방에 가장 크고 웅대한 고안성(高安城)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4년이 지나갔다. 차츰 그들은 당분간 바다 건너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쓰라린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각하게 된다. 중대형의 지나친 백제 유민과의 유착으로 토착세력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죽게 되는 등 국내외의 정치적 여건이 불안정해지자 그는 고구려와의 군사동맹을 통해 백제를 부흥시키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법통을 잇는 신왕국을 일으키고자 새로운 땅 근강으로 천도를 결심한다.
중대형이 새로운 땅과 약속의 땅을 말하자, 백제 유민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나선다. (667년 3월 19일) 희망에 찬 플루트의 소리에 영감을 받은 풀오케스트라의 반응, 금관악기까지 어울려... 아,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기분을 한번 느껴보기 바란다. 유미들은 부푼 가슴으로 새 왕도의 건설에 참여했으며 그곳에서 중대형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일본이라고 명명하고 법령을 새로이 창제한다. (668년) 그는 후에 천지천황(天地天皇)으로 불려지게 된다. 비록 왜가 백제와 태(胎)로 이어진 하나의 형제국이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아예 탯줄을 끊고 독자로서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4악장 (망명왕국의 몰락)
근강에 망명왕국을 세운 지 4년 후 임신년(壬申年), 그 사이 천지천황은 붕어하고 홍문천황(弘文天皇)이 즉위했다. 팀파니와 트레몰로에 이어 비감에 어린 화음이 불길한 기분을 전해준다. 아첼란토로 시작되어 하강하는 화음과 팀파니의 트레몰로는 혁명세력에 의해 홍문천황의 군사와 대진궁(大津宮)이 초토화된 것을 극적으로 효현 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부흥의지는 끝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672년 7월 24일 백제는 비로소 멸망하게 된 것이다.
혁명정부는 역사책의 저술을 시작한다. 기왕에 독자로서의 선언을 한 마당에 자신들의 출생을 철저히 숨기고 싶었다. 왕실은 자신들이 백제에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손족(天孫族)이라고 자신들을 위장하였고 자신들이 비록 본국에서는 패망한 수모를 당하였지만 이역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임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에게 무릎을 꿇은 후 다시 한번 패배를 맛보고 그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멸망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들의 감정을 금관악기의 느리고 길게 이러지는 취주와 애달픈 플루트 소리로나마 달래 줄 수 있을까?
한 유민의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표정은 슬픔도 노함도 아닌, 감정이 마비된 듯한 얼굴처럼 보인다. 그의 표정 위로 그와 닮은꼴의 일본 전통가면이 오버랩된다. 가면을 계속 크게 확대시키고 마침내 스크린은 확대된 눈구멍에 의해 암흑으로 덮인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패배했으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전국을 돌면서 일본의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음악이 가진 감동적인 피날레는 훗날 그 역사의 무게와 복수심을 벗어버리고 신라의 후손과 백제유민의 후손이 화해하는 날 마저 울리게 될 찬가로 남겨놓기로 하자.
Note) 이 글은 최인호 님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재구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