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는 가상 영화 - 충무공 이순신
회사 사보 1995년 1월호에 기고했던 내용입니다.
음악이 있는 가상영화 충무공 이순신
음악이 주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음악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들은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었는데. 문득 이 곡을 가상영화 '충무공 이순신'의 사운드트랙으로 쓰면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대한뉴스도 끝나고 "터미네이터 V" 예고편도 끝나면 달빛이 스며드는 대청마루에서 한 할아버지가 방학을 맞아 시골로 온 손자들을 무릎에 앉히고는 집안의 내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이놈들. 이 할아버지가 이제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야 된다. 알겠냐?"
"예, 그게 뭔데요?"
"우리 남평 문씨 문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얘기가 있는데 말이다. 그게 뭔고 하니 우리 13대조 할아버지께서 오대산에서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지내셨다는 거야."
1악장
모기를 쫓기 위해 피운 화로 연기 위로 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당시의 조선 모습이 오버랩된다. 첫 부분부터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암시하듯 음산한 음악이 들린다. 무책임, 무관심, 복지부동인 하부관리들과 동인입네 서인입네 서로 헐뜯고 이권을 다투는 관료들,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조정과 유림의 무책임한 언동으로 불편한 시정 인심이 불안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편 왜국(倭國)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풍신수길은 조선과 명나라 침략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치밀한 전략을 가다듬는다. 조선 조정에 끄나풀을 심어놓고 허위 정보를 계속해서 흘리기도 한다. 피아노와 금관악기는 그들의 음흉한 음모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약 12분쯤 지날 무렵) 수퍼맨(?) 사운드트랙에서 들었던 테마와 흡사한 부분이 나오면서 비로소 이순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깊은 밤에도 앞날을 대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장군은 왜국의 정세로 보아 그들 세력에 맞서야 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아군의 전력은 맞설 만큼 정예화되어 있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문제해결적인 이 장군은 차분한 가운데에서 어떤 방안을 찾게 된다. 그것은 시스템을 정비하고 팀 파워와 왜국에 못지않은 신기술을 개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과 예산, 비전문인력을 가지고서…
"그런데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언제 나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활약이 시작된단다."
2악장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수병을 엄정한 군기를 가진 일사불란한 군대로 조련하는 한편, 세검정에서는 각종의 무기와 화약을 만들고 개량하도록 기술자들과 회의하고 독려한다.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투함인 판옥선(板屋船)에 철판을 깔고 송곳을 박아 개량한 거북선을 제작하는 데는 도편수들과 목수들의 정성이 컸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이 정성스런 손길로써 선박을 만들고 있다.
위에서부터의 리엔지니어링이 성공하게 된 것은 솔선수범과 지도력의 결실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상하지간에 서로 상의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고 약속하지 않아도 믿음을 주는 심정의 리엔지니어링을 완성한 것이다. 마침내 1592년 음력 4월 12일 거북선이 완성되었고, 앞바다에서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의 시험 사격까지 하고 나니 이순신을 비롯한 모든 수병들이 기뻐했다.
3악장
공교롭게도 거북선이 완성된 다음날인 4월 13일에 부산에 왜병이 상륙하고 순식간에 조선은 피비린내 나는 7년간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여진족의 난리를 진압하던 조선의 명장 신립은 배수진을 치고 전투하다가 전사하여 조선에는 왜군과 맞설 세력이 없게 된다. 그러자 선조는 평양성으로 치욕스러운 몽진을 하게 된다. 선조는 서인과 동인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국정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 한탄하는데 클라리넷 소리는 그의 가느다란 읊조림을 묘사한 듯하다. 몽진하는 나인과 상궁들의 피곤에 지친 듯한 모습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4악장
한산도 앞바다로 적선단(敵船團)을 유인한 이순신은 양학익진(兩鶴翼陣)을 펴서 뒤로는 퇴로를 막고 앞에서는 맞설 준비를 한다. 대장선(大長線)에서 연을 날리고 북을 두들겨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고 지시를 내리자 거북선 두 대가 학익진 앞쪽으로 비어져 나온다. 군령나팔과 북이 요동치고 그에 따라 노를 젓는 수병의 심장은 힘차게 펄떡거리기 시작한다. 사정거리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자 포 사격을 명령하는 신호탄이 터진다.
천자총통(天字銃筒) 발사! 꿍!~ 쿠왕 철썩. 정신없이 포탄세례를 받은 왜선들이 혼비백산해 있을 때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귀신 머리와 용머리를 단 괴상한 배가 그들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뿌지지지직~ 뻑! "다스케떼, 다스케떼!(사람 살려)" "오카상!(엄마!)"
현자총통, 황자총통(黃字銃筒)을 발사하여 접근한 적선의 갑판 위를 부수면서 왜군 모두를 수장시켜버리고 만다. 성공 성공. 신무기라는 조총을 가지고 껍적대던 왜군도 조선의 신장비와 발굴의 투지를 가진 팀워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음악에 맞춰 영상을 만들다 보니 스타워즈의 전투신보다 더 과격하고 스펙터클하게 제작되어 현재 아카데미 특수 효과상에 노미네이트 되어 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첩보에 의하면 왜군은 제해권(制海權)을 빼앗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대규모의 왜선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아군이 수적으로 열위에 있으므로 해류를 최대로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적선을 맞기로 한다.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를 선택하여 자전을 세우고 전투를 벌인다.
그런데 이 장군은 왜군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고 태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그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조선의 수군이 흐트러졌으나 이내 위기에서 벗어나 왜군의 수군을 전멸시켰다.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이순신. 그러나 치료약의 부작용으로 전처럼 강한 체력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운명이 결국은 유배나 사약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 증세가 생기게 되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팀워크는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효과적이지만, 조정의 시스템은 자신만의 힘으로는 그 모순을 고칠 수 없다는 좌절감으로 고민한다.
그는 결국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곳으로 피해 숨어 있기로 작정한다. 폐인이 된 그의 뒤를 돌보는 장수가 바로 13대조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영화는 비로소 충무공의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을 잡아내기 시작한다. 얼마 후 초라하게 세상을 뜨게 되는 자연인 이순신의 눈동자에는 자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팀파니와 큰 북의 장대한 마무리로 영화가 끝나면서 출연진과 제작진의 자막이 화면 위로 올라간다. 멈춰진 화면 뒤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에이 할아버지는 엉터리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얘기는 왜 조금밖에 안해줘."
"정말 너무한다. 그런게 어딨어!"
"허허허, 녀석들…"
(Note)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을 자의적으로 짜맞추기해서 본 뜻을 오도하고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내용을 임의로 덧붙인 점에 대해서는 모쪼록 너그러운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란다.